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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정신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행한다

by 탐탐이 2022.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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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에서 다윈이 진화론을 통해 새 시대를 열었듯, 심리학에서 프로이트의 역할은 상당하다. "정신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행한다"라는 명제는 정신에 대한 기존의 사고 방식 전체를 뒤집어엎는 혁명적 전환을 상징한다. 이성으로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정신 내의 심리 영역이 있음을 제기한 철학자는 그 이전에도 간간이 있었다. 하지만 심리를 의식의 일부분으로 보더라도 본격적인 탐구 대상으로 삼지는 못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독립 영역을 설정하여 규명한다. 나아가서 무의식이 판단과 행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통해 전통적인 관념을 뒤흔든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의 진행 과정은 무의식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정신은 무의식 단계로 먼저 존재한다. 이는 "자아가 자신의 집안에서도 더 이상 주인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행동이 의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무의식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사례를 통해 보자. 우리는 평소에 수많은 실수를 거듭하며 살아간다. 본래 하려던 말과 전혀 다른 말이 입에서 튀어나와 당황하기도 하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행동해 낭패를 보기도 한다. 왜 그런 실수를 했느냐고 물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순한 실수에 불과하다고 얼버무리게 마련이다.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 그대로 실수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국회의장이 개회사를 하면서 "국회가 폐회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고 했던 에피소드를 예로 든다. 국회의장이 엄숙한 국회에서 한 실수이기에 장안에 널이 회자됐던 모양이다.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다. 마중을 간다는 말을 배웅이라는 단어로 대신하고, 만나는 자리에서 헤어지는 인사를 한다거나 반가워해야 할 자리에서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는 실수는 누구나 한다. 우리는 이러한 실수에 대해 순간적으로 말이 엉킨 것이라며 웃어넘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 실수 행위란 심리적인 행위"라며, 실수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무의식의 작용이라고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국회의장의 사례도 단순히 말이 헛나간 게 아니다. 회의를 빠르게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다가 말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게 무의식적 욕구는 의식을 통제 아래 억눌려 있다가 의도하지 않은 틈새를 뚫고 튀어나온다.

 

순서를 구분하자면 우선 회의를 하기 싫다는 무의식이 있다.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식에 눌린 채 말이다. 국회의장의 실수는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의도가 간섭하다가 충돌하고 뒤섞이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다른 종류의 실수에도 확대 적용된다. 대부분의 실수는 우연한 현상이 아니고 무의식을 동반하는 진지한 정신적 행위다.

 

실수는 무의식과 의식의 간극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행위와 마음의 알 수 없는 동기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는 다반사다. 무의식은 어쩌다 불쑥 튀어나오는 데 머물지 않고 일상적인 생각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을 의식과 동일시하는 견해는 현실과 전혀 맞지 않다. 정신은 감정과 사고, 의지 등을 모두 포함하며 무의식이 그 모든 요소에 결합되기 때문이다. 의식이 무의식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형국이다.

 

프로이트는 꿈에 대해서도 "신체적인 현상이 아니라 심리 현상"이라는 견해를 밝힌다. 이는 꿈에 대한 칸트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반박이 아니더라도 칸트의 견해에는 빈구석이 보인다. 악몽이나 가위눌림은 꿈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수많은 사람이 다양한 꿈을 꾸는데, 혈액이나 근육의 이상 증세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소원이 꿈을 유발시키며 소원 성취가 꿈의 내용을 구성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아쉬움, 동경, 채워지지 않은 소망등을 남긴 낮의 체험에 대한 반응이다. 평소에 호수에서 배를 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면 무의식 속에 남았다가 꿈에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어린이의 꿈은 소원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꿈은 왜곡된 형태를 보인다.

 

성장 과정에서 가정과 사회의 교육이나 도덕률 등이 작용하면서 의식의 층이 두텁게 형성되고, 무의식에 대한 억제가 강화되면서 꿈에 영향을 미친다. 소원이 순진할 정도로 숨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무의식은 완화된 형태로 드러나거나 암시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꿈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기 위해서는 심리학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성적 억압이 무의식을 형성한다

 

한편 왜 정신이 '무의식' 단계를 거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무의식과 의식이 갈등을 일으키고, 무의식이 평소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니체가 지적했듯이 역사적으로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종교나 도덕은 일관되게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억압한다. 타락이나 죄악이라는 딱지를 붙여 본능을 억제하거나 드러내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본능을 대표하는 식욕, 성욕, 수면욕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통제받는 것은 단연 성욕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성욕을 억누르게 된다. 의식에 의해 억압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는 무의식에 성정인 요인이 가장 큰 이유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적인 것으로 지칭할 수 있는 본능 충동이 신경증이나 정신질환을 불러 일으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이 말은 성이 원초적으로 무의식의 뿌리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혹자들은 어린아이에게 성욕이 있겠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보면 성적인 요소가 자주 발견된다. 인간은 서너 살 이전부터 자기 성기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놀다가 우연히 묘한 느낌을 경험하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비슷한 행위를 한다. 이에 대해 어른들은 남아에게 "고추를 자꾸 만지면 떨어져 나간다"라고 하고, 여아에게는 "벌레가 들어간다"라며 위협한다. 일종의 자위행위를 억압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하는 놀이만 봐도 그렇다. 예를 들어 서너 살만 넘어도 엄마와 아빠로 나누어 역할 놀이를 즐기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신체 접촉을 한다. 다른 역할 놀이도 마찬가지다. 말을 타고 가는 시늉은 물론이고 누구나 해봤을 의사 놀이는 더욱 적극적이다. 환자의 몸을 만지거나 심지어 옷을 벗기 도 한다. 어린 나이에도 나름의 방식으로 흥분을 기대하고 충족한다.

 

부모나 주변 어른들은 아이들의 놀이 과정에서 성적인 요소가 눈에 뛸 대 질색을 하며 야단을 친다. 아이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어른들에게 경계 대상이라는 점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놀이를 하다가 신체 접촉이 필요한 행동은 어른들이 없을 때 시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은 보다 근본적인 방식으로 대응한다. 예를 들어 서너 살이 넘은 후부터는 부모나 교사 혹은 어른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공간에는 남여 아이들을 함께 두려 하지 않는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은 성적인 호기심과 욕망에 대한 노골적인 억압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억압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우울증이나 히스테리 같은 정신질환은 성장 과정에서 본능에 대한 억압의 정도가 극심할 때 나타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에 따르면 심리학은 유아기의 성적 욕구와 이에 대한 억압을 추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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