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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종교가 죄의식을 통해 심리를 지배한다

by 탐탐이 2022.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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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가 죄를 '고안'한다고 말한다. 이는 말 그대로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죄를 줄이는 데 힘써야 하는 종교가 일부러 죄를 고안해낸다는 주장은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살펴보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의 시작 부분은 사제의 심리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성경의 시작 부분이란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에 얽힌 내용이다. 신은 인간을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창조한 후 에덴동산에서 아무런 고통도 없는 행복한 삶을  약속하는 대신 하나의 금기를 제시한다. 바로 신이 만든 모든 자연의 산물을 취할 수 있으나 오직 선악과만은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이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는다. 신과의 약속을 어겼기에 아담과 이브는 물론, 그들의 자녀인 모든 인간은 병과 고통, 육체적 죽음을 겪는 저주를 받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이렇게 인류의 조상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신의 명령을 거역한 죄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생긴다. 바로 기독교 교리의 출발인 원죄론이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대표적 교부인 아우쿠스티누스도 원죄론 위에 교리를 세운다. 아담의 죄는 근복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그는 말한다.

 

"어린 시절에도 죄가 있다. 연약한 어린아이의 몸에는 죄가 없지만 그 영혼에는 죄가 있다.

 

그는 심지어 아직 사회적 관습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조차도 죄를 지닌 존재로 규정한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도 죄인이므로, 죄인이라는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러한 원죄론이 부정되는 순간 기독교는 순식간에 권위를 상실한다. 만약 누구는 죄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죄가 ㅇ없다면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이지 않다. 사람에 따라 구원이 필요 없기도 한다면 그만큼 사람들에게 미치는 종교의 영향력도 상당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포교를 해야 하는 사제들로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논리를 자기 심리 안에 철저하게 체화해야만 했다.

나아가 모든 사람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강박관념으로 만들어 놓아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자신이 갖고 태어난 죄 때문에 현세든 내세든 벌을 받게 된다는 두려움은 구세주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는 죄와벌의 반대편에 은총과 용서, 구원을 자리 잡게 한다.

 

 불교 교리에서는 여덟 가지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고통, 늙어가는 고통, 병으로 인한 고통, 죽음에 이르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고 사는 고통,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고통, 갖가지 탐욕과 집착에서 오는 고통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 아닌 건 없다. 본능적인 욕구는 물론이고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랑하는 일조차도 모두 고통이다. 니체는 불교가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말할 뿐, 이를 죄로 연결시키지 않기에 기독교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객관적이라고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교는 선악의 저편에 있다. 하지만 불교 역시 인간의 삶을 고통이라는 틀 안에 이해함으로써 현실의 인간이 불핼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기는 마찬가지다. 기독교 교리에 의하면 죄인이기 때문에 불행하고, 불교 교리에 의하면 고통스러운 삶이기 때문에 불행하다.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숙명으로 받으들여야 한다. 기독교가 죄를 고안한다면, 불교는 고통을 고안한다. 다만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기독교는 구세주를 통한 구원에서, 불교는 개인적인 깨닭음에서 찾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죄를 고안하여 심리를 지배한다는 것은, 심리를 조작하여 행동을 조종한다는 의미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인생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떤 심리에 사로잡힐까? 그것은 바로 본능을 포기하려는 마음이다. 현실에서 본능적 욕구를 충족 시키는 일은 죄나 고통을 키우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종교는 현실에서 행복은 불가능하고 오직 내세나 해탈을 통해서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숙명론적 심리를 퍼뜨린다. 

 

종교는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 숙명론을 심어두려 했을까?

사람들은 식욕과 성욕, 수면욕을 비롯한 육체적 본능과 권력욕을 추구할 때, 다시 말해 당장의 행복을 실현하고자 할 때 이를 가로막는 걸림돌에 저항하게 된다. 여기서 대표적인 걸림돌은 신분제나 빈부격차를 비롯한 현실의 착취와 억압 구조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지배 세력에 저항해야 한다.

 

인간이 불행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물질적 조건, 넉넉할 정도의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필요하다. 또한 권력을 쟁취할 수 있으려면 신분이나 계급의 벽이 무너져야 한다. 그러니 지배층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제들은 이를 막을 논리가 필요했다. 불행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인간의 감각을 말살하기 위해 죄와 고통을 고안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오직 내세나 개인적 초월 이외에 행복을 구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숙명론적 사고방식을 갖도록 심리를 조작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중세에 종교가 했던 역할을 이성이 대신했을 뿐이었다. 인간 내부에서 비롯되는 심리 현상의 실체를 인정했던 죄의 개념을 실천이성 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학문적으로 치장 했다고 비판한다. 여기에서 실천이성이란 우리가 흔히 정언명령이라고 말하는 의지나 행위를 항상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에 타당하도록 해야한다는 의무론적 도덕관을 의미한다.

 

인간 본능을 악이라는 도덕적 개념을 통해 다시 억누르는 것이다. 이성은 본능의 상실, 행복의 후퇴를 초래하기에, 다시 인간을 타락으로 이끈다. 개인의 심리를 사회적 원인과 연결하는 통로가 마련된다. 하지만 개인의 특수한 성장 과정에서 형성되는 심리적 요인에 대해서는 다루지 못한다.

 

심리가 의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형성될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도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의식이 아니라면 그 정체가 어디에 있는지, 또한 구체적인 특성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한계도 지닌다. 이 작업은 이후 무의식 영역을 설정하고 고찰함으로써 활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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