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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왜 '쿨함'에 목숨 거는가?

by 탐탐이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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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쿨하지 못한 저 자신이에요."

이 말이 내 귓가에 한참이나 맴돌았다. 얼마 전 한 환자가 내게 한 말이다. 그녀는 실연을 당했노라고 했다. 나는 실연이 때론 죽음보다 더한 고통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실연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보다 그깟 이별쯤 '쿨'하게 털어 버리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우울해하는 자기 자신을 더 못견뎌 했다. 쿨하지 못함, 그것이 그녀를 초라하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많이 안타까웠다. 제대로 사랑했다면 느닷없는 실연의 아픔에는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명도 없다. 오히려 아픈데도 아픈 줄 모르는 사람, 슬픈데도 슬픈줄 모르는 사람,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가 많은 법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터트렸을 때 평쳐질 상황이 무서워, 언젠가부터 그런 감정이 일어나면 무조건 억눌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하게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감정은 마음속에서 곪아 터지게 되어 있다. 무조건 감정을 발산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심한 감정 절제가 안 좋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실연 당했을 때 우울함을 경험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쿨한 사람과 나르시시스트의 공통점

요즘 젊은이들은 '쿨' 하게 사랑하고 '쿨' 하게 살고 싶어 한다. 쿨함에 열광하는 그들에게 최고의 찬사는 '쿨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왜 하필 '쿨'일까?

 쿨한 사람들은 남의 눈치 안 보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또한 세련되게 잘 차려입은 옷차림에, 냉정함과 침착함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로 무장하고 인생을 즐기며,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고, 타인에게 무심한 듯 힐끗 한 번 눈길을 주고 제 갈 길을 간다.

그런데 저널리스트인 딕 파운틴의 말에 따르면 쿨의 핵심은 언제나 쿨하게 '보이는' 데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의존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볼 때 쿨한 사람은 남의 시선에 무관심하다. 그래서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곁에 있으나 없는 듯한 '이방인' 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이방인은 쿨한 사람의 눈길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고 싶어 그를 갈망하는 눈으로 응시하게 된다.

쿨한 사람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겉으로 무관심한 척할 뿐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갈망하며, 심지어 그것에 좌지우지되기까지 한다.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원하는 감정을 타인에게 던져 버리고 그를 멸시함으로써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쿨한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그들은 세상을 자신의 반사경으로 보면서 타인의 눈에 투영된 자신의 이미지 외에는 아무것도 흥미를 갖지 않는다. 타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반쯤 입을 벌리고 자신을 보며 감탄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만족을 구할 뿐이다.

 

여기에 한몫 거드는 것이 범람하는 이미지의 세상이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이나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어디서든지 당장 꺼낼 수 있는 카메라는 우리의 현실 생활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항상 자신 앞에 카메라가 있고 자신의 행동을 누군가가 보고 있는 양 미소를 짓고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보이는 이미지에 몰두하다 보면 타인의 감정을 돌아볼 여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쿨한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쿨한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를 닮아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봐 주기를 바란다. 그것이 갓난아이 적 가만히 누워 엄마가 눈을 맞춰 주기를 기다리던 의식의 먼 밖에 있는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는 엄마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 더 이상  외부의 시선에 매달리지 않게 된다. 반대로 엄마가 아이를 쳐다보지 않거나 내킬 때만 눈길을 주면 아이는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며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게 된다. 그리고 그처럼 열등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방어하기 위해 아이는 남들에게 사랑받는 전지전능한 과대적 자기를 만들어 낸다. 일명 '거짓 자기' 이다. 그러고는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져 결국 이루지 못할 사랑의 고통 속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 나르키소스처럼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진다.

 

이러한 나르시시스트들의 과대 자기는 그 기반에 약해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항상 외부로부터의 확인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겉으로는 독립적이고 외부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현대의 나르시시스트들은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를 항상 의식하며 거기에 민감하다. 그래서 타인의 사소한 시선이나 말 한마디에도 큰 상처를 입는다. 또한 이렇게 남의 시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남들에게 받을 수 있는 상처를 예방하기 위해 오히려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들이 택할 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기

 

쿨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을 회피한다. 애써 감정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대인 관계로 인한 상철로부터 자신을 지킨다.

'도쿄에 올라와서 기숙사에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모든 사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 것, 모든 사물과 나 자신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둘 것, 그것뿐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 와타나베가 한 말이다. 왜 와타나베에게는 거리 두기가 필요했을까? 그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가 아무런 이유나 설명도 없이 갑자기 자살해 버린 아픈 기억이 있다. 친구의 자살은 감수성이 예민한 와타나베에게 큰 혼란과 슬픔, 배신감을 남겼다. 와타나베는 감당하기 힘든 혼란을 처리하기 위해 상처를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만들어 버린다. 통제하기 힘든 감정에 전혀 흔들림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 감정을 통제하는 '역설적 초연함'을 무기로 내세운 것이다.

'역설적 초연함' 이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은 물론 자신의 감정과도 거리를 두는 것을 말한다. 그때그때의 감정에는 충실하나 분노, 슬픔, 외로움 등 오래 지속되면서 거치적거리는 부정적 감정에는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그 누구와도 저서적으로 얽히는 것을 피하려는 태도이다.

 

쿨함에 숨어 있는 역설적 초연함은 대인 관계에서 오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방어함과 동시에 현대 사회 속에서 겪는 좌절감과 박탈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장치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풍요로우며 화려함이 넘치는 사회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오히려 막연한 불안과 박탈감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자율성의 극대화에는 모든 것을 개인이 혼자 결정하고 그 책임 또한 혼자 져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스타들의 화려한 삶에 비해 우리의 생활은 한없이 초라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성공담은 우리의 무능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어떤 것을 성취해도 나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기에, 개인은 끝없이 비교를 하고 비교를 당하는 '잘못 적용된 사회적 비교'의 틀에 갇혀 막연한 불안과 무력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이러한 박탈감과 무력감, 불안 등에 대처하는 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어넘기거나 모든 불합리함을 기성 사회의 잘못된 유산으로 치부해 비웃어 부는 것이 편이할 수 있다. 역설적 초연함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노예 시대 때 '쿨' 이 일종의 생존을 위한 마음가짐, 즉 계속되는 착취와 차별, 불이익을 견뎌 내기 위해 고안해 낸 방어 장치였듯 현대 사회에서 '쿨' 은 또 다른 사회적 좌절감과 박탈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책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쿨함, 현대 사회가 낳은 슬픔

쿨함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 쿨함의 딜레마가 있다. 쿨한 사람도 점차 나이를 먹으면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 수 있는 젊음을 잃어버리게 된다.아무리 쿨해 봤자 더 이상 남이 쳐다봐 주지 않는 시기가 오는 것이다.

 

한편 쿨함은 차별적이다. 자본주의적인 속성 위에서 자란 쿨함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면을 띤다. 다시 말해 쿨함에는 어느 정도의 재력이 필요한 것이다. '파리의 연인' 에서 박진양은 쿨하다. '내이름은 김삼순' 의 현빈과  '커피프린스 1호점' 의 공유도 쿨하다. 그러나 '파리의 연인' 김정은과 ' 내 이름은 김삼순' 의 김선아, '커피프린스 1호점' 의 윤은혜는 결코 쿨할 수 없다 삶이 그들에게 쿨함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김별아의 소설 이상한 오렌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쿨하다는 것은 한없는 상냥함이야. 그것은 질척대는 삶의 중력권 밖에 있다는 얘기거든. 그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허락 되지 않는 거야. 살기 위해서는 일상에 신음하기 마련이니까."

삶이 쿨함을 허락하지 않더라도 쿨함이란 갑옷으로 무장하려는 젊은이들은 그래서 슬프다. 쿨함에 목숨 거는 젊은이들은 말 그대로 멋지고 자유롭고 세련되게 보이기 위해 애쓰지만, 알고 보면 한치 앞도 모르는 시대에서 살아남고자 악다구니를 쓰는 것이고, 외로우면서도 상처 입기 두려워 외로움을 참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감추고 있거나 억누르고 있는 분노가 자신을 해칠 수도 있음을 그들은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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