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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 그 저주에 대하여

by 탐탐이 2022.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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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멋진 신세계가 있다. '공유, 균등, 안정' 이라는 표ㅕ어를 내세우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체격과지능, 성격 등의 특성은 물론이고 작업과 취미, 적성도 인공적으로 미리 정해진 채로 태어난다. 예를 들어 열대 지방에서 노동자로 일하게 될 태아에게는 일찌감치 수면병과 티푸스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 준다. 그리고 로켓 조종사가 될 태아에게는 회전력을 키워 줌으로써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도 행복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이철럼 철저한 인공 조작을 거쳐 대량 생산된 아이들은 성인이된 뒤 이미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일을 하기만 하면 물질은필요에 따라 충분히 공급받는다. 또 최첨단 과학 설비들의 도움으로 편리한 생활을 누리며, 성생활도 자유롭게 한다. 따라서 육체적 고통이나 물질적 근심, 걱정, 불만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고민이나 불안이 생기면 행복한 감정을 유지시키는 '소마'라는 알약을 먹으면 된다. 소마는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고, 돌아올 때도 골치 아픈 게 전혀 없는' 특효약이다.

위는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존이라는 남자는 신세계의 지도자인 총통 무스타파 몬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나이를 먹어 추해진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원한다는 말인가?" 긴 침묵 끝에 존은 대답한다.

"네, 저는 그 모든 권리를 요구합니다."

 

매일 백오십 번, 선택의 기로에 서는 사람들

인간 공학의 혜택으로 모든 사람이 안정과 행복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왜 존은 굳이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한 것일까. 모든 것이 타인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삶. 그것에는 인간을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그것은 설사 불행해지는 한이 있어도 나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할 자유이다. 존은 결국 결정지어진 미래가 아닌, 자신이 마음껏 선택하고 그것에 따라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미래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질 수만 있다면 불행해질 권리마저 껴안겠다고 한 것이다.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은 그만큼이나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나도, 당신도 그런 자유를 가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기쁜가.

게다가 21세기는 그야말로 다양성과 이동의 시대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발달하고 변화하며, 감각적이고, 이동이 잦으며, 많은 것이 충분함을 넘어서 홍수를 이룬다. 따라서 우리가 선택할 물건도, 할 수 있는 일도 훨씬 더 많아졌다. 그런데도 정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선택할 게 많다는 것이 복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것 중에 선택을 하라고 하면 그건 저주가 된다. 왜냐하면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해서 나머지 것들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유혹과 가능성을 포기하고 선택한 것이 최상의 선택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다른 선택이 더 옳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매일 백오십 번씩 선택을 할 상황에 놓이며, 그 중에서 서른 번 정도 신중한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다섯 번 정도 올바른 선택을 한 것에 대해 미소를 짓는다고 한다. 삶의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 이며,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 주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제 사람들 눈에는 자신이 선택한 한 가지보다 포기한 수많은 것이 아른거린다. 더 행복했을지도 모를 다른 가능성에 대한 미련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고 우울해한다. 가지 않은 길을 쳐다보느라 가야 할 길을 못 가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 것이다. 또 일단 선택을 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선뜻 '선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오히려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 앞에서 그 상황을 저주처럼 여기며 두려워한다.

 

서른 살, 선택이 더 힘든 이유

 

서른 살은 앞으로의 인생을 좌우할 중요한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선택의 시기이다. 그러나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은 수많은 가능성 앞에서 흔들린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최선일까? 어떤 선택이 가장 안전할까?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인생을 망치면 어떡하지? 물론 이것저것 비교해 보고 충분히 실험해 본 뒤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주위에서 시간이 엇다며 빨리 선택하라고 재촉한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더 이상 이것저것 시험해 볼 여유가 없는 나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서른 살의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인은 불확실성이다. 원래 불확실한 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모험심과 도전 정신을 자극한다. 불확실한 것을 어떻게든 풀어서 확실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이다. ㅁ나일 모든 것이 확실하다면 이 세상에 무슨 재미가 있고 우리가 어떤 의욕을 가지겠는다.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흘러가고 예측 가능하다면 굳이 어떤 의지나 희망을 갖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즉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아직 불확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다.

 

불확실성이 가지는 가능성의 요소는 인간관계에도 해당된다. 상대의 마음이 어떤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졸이며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영화나 소설을 볼 때도 뻔한 결말은 어떠한 흥미도 유발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세븐' 이나 '식스 센스' 처럼 끝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 ㅇ벗거나, 우리의 예측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영화에 빠져 든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불확실성은 인간 존재의 한 전제 조건이며, 정신 발달의 추진력이다. 또한 불확실성이 어떤 큰 흐름이나 규칙 속에 존재할 때는 인생의 자극제가 되고 즐길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규칙을 넘어설 정도로 너무 클 경우, 우리는 넓은 사막에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면 불안 지수가 높아지면서 다가올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비해 자기 방어적이고 공격적이 되기 쉽다.

 

그런데 아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점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아무리 최상의 선택을 한다 해도 그 미래가 불확실하는 것, 이제 더 이상 평생 직장이란 없으며 숨막히는 무한 경쟁 체제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 그러한 불안은 젊은이들을 자신의 내부로 움츠러들게 만든다. 변덕스런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능력도 변덕스러워서 언제 그 능력이 발휘될지, 언제 또 그 능력의 한계가 드러날지 모른다. 그래서 능력에 대한 확신마저 흔들리는 가운데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전전긍긍한다.

서른 살, 그들은 물질적 풍요로움과 선택의 자유로움을 부여받았지만 그들이 서 있는 땅은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지극히 불안정한 땅이다. 그래서 무수한 선택의 자유는 그들에게 더욱더 '저주'로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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